1343년 정월, 원나라는 도조의 손자 교주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환조 이자춘에게 관직을 임시로 잇게 하였다. 실록은 환조의 몽고 이름을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라고 적었다. 이 화는 관직을 이어받은 환조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관직을 어린 조카에게 돌려주려 한 기록을 따라간다. [근거: 『태조실록』 총서 제21·22기사]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Jason22 (CC BY-SA 3.0)
이자춘, 오로사불화
환조의 휘는 이자춘(李子春)이다. 『태조실록』 총서는 그의 몽고 이름을 오로사불화라고 기록하였다. 이름 두 가지는 고려와 원의 제도가 겹쳐 있던 동북 지역의 정치 환경 속에서 실록에 함께 남았다. 마지막 문장은 이름이 함께 기록된 사실에 대한 시대적 배경 설명이며, 구체적인 이름 수여 장면은 실록에 적혀 있지 않다. [근거: 『태조실록』 총서 제22기사]
환조의 휘는 이자춘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이다.— 『태조실록』 총서 제22기사, 국역 인용
고증 메모. 실록은 환조가 언제 누구에게 오로사불화라는 이름을 받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화에서도 '이름을 받는 장면'이나 그때의 나이와 장소를 만들지 않는다. 확인되는 사실은 이자춘과 오로사불화라는 두 이름이 총서에 병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타기와 활쏘기
실록은 환조가 일곱, 여덟 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고, 장성한 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적었다. 관직을 이어받자 사졸들이 즐거이 따랐다는 문장도 이어진다. 이는 후대의 평가가 포함된 왕조 총서의 기록이므로, 이 화는 그 표현을 기록의 문장으로만 제시한다. [근거: 『태조실록』 총서 제22기사]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태조실록』 총서 제22기사, 국역 인용
환조가 관직을 잇게 된 직접 계기는 도조와 탑사불화의 연이은 죽음, 그리고 탑사불화의 아들 교주가 어렸다는 사정이었다. 1343년 원나라의 결정은 환조가 영구히 관직을 차지하라는 내용이 아니라, 교주가 성년이 될 때까지 임시로 이어받으라는 것이었다. [근거: 『태조실록』 총서 제21기사]
교주에게 돌려주려 하다
교주가 점차 장성하자 환조는 직사를 그에게 돌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교주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실록은 환조가 관직을 되돌리려 한 사실과 교주가 거절한 사실을 짧고 분명하게 기록한다. [근거: 『태조실록』 총서 제22기사]
교주는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을 만났다. 공민왕은 교주를 우다치에 소속시켰다. 실록의 주석은 우다치를 고려 말 임금의 신변을 호위하던 숙위병 계통의 관직으로 설명하며, 교주의 벼슬은 중순 군기윤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근거: 『태조실록』 총서 제22기사와 해당 주석]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Gary Todd (CC0)
용비어천가 제8장의 계승 노래
『용비어천가』 제8장은 하늘이 세자를 가리고 황제의 명이 내린 뒤 성자가 태어났다고 노래한다. 이 노래는 조선 건국 뒤 왕실 선대의 계승을 천명과 연결한 문헌이다. 이 화에서는 노래의 판단을 역사적 인과로 확정하지 않고, 환조의 관직 계승을 왕실이 어떻게 노래로 재구성했는지 보여 주는 1차 문헌으로만 인용한다. [근거: 『용비어천가』 제8장]
세자를 하늘이 가리시어, 왕의 명이 내리시거늘 성자를 내시나이다.— 『용비어천가』 제8장 현대어. 위키문헌 표기는 '(원나라)왕의 명'으로 풀이한다.
| 항목 | 실록의 내용 |
|---|---|
| 휘 | 이자춘(李子春) |
| 몽고 이름 |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
| 관직 계승 | 1343년 교주가 성장할 때까지 임시 계승 |
| 교주와의 관계 | 성장한 교주에게 직사를 돌려주려 했으나 교주가 사양 |
1355년 공민왕을 만난 환조가 이듬해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고, 고려군과 함께 쌍성을 수복한 기록을 따라간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