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 총서는 익조 이행리가 여진 천호들의 모해를 피해 알동을 떠난 일을 길게 적었다. 이 화는 그 기록을 따라가며, 익조의 가계와 아들 도조(선래)의 탄생, 익조의 죽음까지 실록 순서대로 다룬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Mongolernas välde mot slutet av 1200-talet" (Hildebrand·Selander, 퍼블릭 도메인)
여진 천호들의 모해
목조는 때때로 현성(峴城)에 가서 여진의 천호와 다루가치들과 교제하였다. 익조에 이르러서도 이 관행은 고쳐지지 않았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해지자, 천호들의 수하 가운데 익조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실록은 천호들이 이를 꺼려 모해하려 하였다고 적는다.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태조실록』 총서 2장 B면, 국역 인용. 천호들이 주고받은 말이다.
천호들은 북쪽 땅에서 사냥을 하고 오겠다며 20일 동안 모임을 멈추자고 청하였다. 익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기일이 지나도 천호들은 오지 않았다. 익조가 직접 현성에 가 보니 노약자와 부녀자만 남아 있고 장정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할멈의 물 한 그릇과 적도의 물길
돌아오는 길에 익조는 물동이를 이고 주발을 든 할멈을 만났다. 목이 말랐던 익조가 물을 청하자, 할멈은 주발을 깨끗이 씻어 물을 떠서 바쳤다. 그리고 천호들이 익조를 도모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갔다는 사실과 3일 뒤에 반드시 다시 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익조는 황급히 돌아와 가인들에게 가산을 배에 싣고 두만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 적도(赤島)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는 손 부인과 함께 가양탄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았다. 알동의 들에 적병이 가득 차 오고 있었고, 선봉 300여 명이 거의 뒤를 따라왔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적도(赤島)의 북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의 넓이는 6백 보(步)나 될 만하고,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약속한 배도 또한 이르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북해(北海)는 본디 조수(潮水)가 없었는데, 물이 갑자기 약 백여 보(步) 가량이나 줄어들어 얕아져서 건널 만하므로, 익조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白馬)를 같이 타고 건너갔다.— 『태조실록』 총서 2장 B면, 국역 인용 요약
종자들이 모두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불어나 적병은 건너지 못하였다. 실록은 북방 사람들이 이를 두고 "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적었다.
익조는 그곳에 움집을 짓고 거주하였다. 알동의 백성들이 익조의 거처를 알고 따라와 섬 안에 함께 살았다. 오랜 뒤 직도·추도·초도의 재목으로 배 10척을 만들었고, 지원(至元) 27년(1290) 경인에 수로로 의주에 돌아와 거주하였다. 공주의 백성들도 그를 따랐고, 그 땅은 적도에서 왔다는 이유로 지금도 적전(赤田)이라 부른다고 실록은 적는다.
손 부인의 두 아들과 최씨 부인
익조의 첫째 부인 손 부인은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규수(嬀水), 다음 아들은 복(福)이다. 손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익조는 정비(貞妃) 최씨를 다시 맞았다. 최씨는 등주(登州, 곧 안변)의 호장 최기열의 딸이다.
익조는 등주의 협촌에 영업전을 두고 거주하였다. 또 백성 30호를 등주 서쪽 15리에 머물게 하였는데, 뒤에 그 땅을 삼십호평(三十戶平)이라 불렀다고 실록은 적는다.
도조 선래의 탄생
익조와 최씨 부인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두 사람은 낙산 관음굴에서 기도하였다. 실록은 그날 밤 꿈에 승복을 입은 중이 나타나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은 선래(善來)라고 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이곳에 거주한 지 수년(數年)만에 아들이 없으므로 최씨(崔氏)와 함께 낙산(洛山)의 관음굴(觀音窟)에 기도했더니, 밤의 꿈에 한 승복(僧服)을 입은 중이 와서 고(告)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은 선래(善來)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아이를 배어 과연 의주(宜州)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마침내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했으니, 이 분이 도조(度祖)이다.— 『태조실록』 총서 3장 A면, 국역 인용
실록은 이 무렵 익조가 안변에 자주 왕래하였고, 간혹 화주와 함주에도 갔다고 덧붙인다.
1300년의 다루가치와 익조의 죽음
1300년 10월 원나라 성종은 칙명으로 익조에게 승사랑(承仕郞)을 제수하고,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을 다스리는 다루가치의 일을 맡겼다.
성종(成宗) 대덕(大德) 4년(1300) 10월에 칙명(勅命)으로 승사랑(承仕郞)을 제수(除授)하여, 쌍성 등지의 고려(高麗) 군민(軍民)을 다스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일을 맡게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3장 A면 (1300), 국역 인용
익조는 9월 10일에 훙하였다. 실록은 그 연도를 '모년(某年)'으로만 적어 두었으므로, 이 화에서는 연도를 확정하지 않는다. 안변부 서곡현 봉룡역 북동에 장사하였고, 그곳이 지릉(智陵)이다.
용비어천가가 노래한 적도
『용비어천가』 제5장은 적도의 웅덩이를 임금 노릇의 어려움에 견준다.
적도(赤島) 섬 안의 웅덩이를 지금에야 보시노니, 임금 노릇 어려움이 이러하니— 『용비어천가』 제5장 후반, 현대어 풀이 (위키문헌 원문 대조)
이 시는 적도의 웅덩이를 제왕의 어려움에 견준 대목이다. 실록의 적도 기록과 함께 읽는다.
| 연도(원 연호) | 사실 |
|---|---|
| 1290년 (지원 27년 경인) | 배 10척으로 수로를 따라 의주에 돌아와 거주 |
| 1300년 10월 (대덕 4년) | 승사랑 제수, 쌍성 등지 고려 군민 다루가치 |
| 연도 미상 ('모년') | 9월 10일 훙, 안변 봉룡역 북동에 장사(지릉) |
도조 이춘(선래)이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고, 알동 백호의 딸 경비 박씨와 혼인하는 기록을 다룬다. 두 아들이 누구인지도 함께 본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