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4년 12월 목조가 훙(薨)하였다. 이듬해인 1275년 3월, 목조의 아들 익조 이행리가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이 화는 그 두 해의 기록에서 시작해 익조가 아버지의 땅에서 맡은 일을 따라간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Das Mongolenreich unter den Erben Dschingis Khans" (Postmann Michael, 퍼블릭 도메인)
목조의 죽음과 장사
목조는 1264년 5월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 천호로 충원되었다. 그리고 1274년 12월에 훙(薨)하였다. 실록은 공주(孔州, 곧 경흥부) 성 남쪽 5리에 장사하였다고 적는다. 훗날 함흥부 의흥부 달단동으로 옮겨 장사하였는데, 그곳이 덕릉(德陵)이다.
지원(至元) 11년(1274) 갑술 12월에 훙(薨)하니, 공주(孔州) 【곧 경흥부(慶興府)이다.】 성(城) 남쪽 5리(里)에 장사하였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德陵)이다.— 『태조실록』 총서 2장 A면 (1274), 국역 인용
장사 장소는 한 차례 옮겨졌다. 실록은 이 이장을 '후일'이라는 말로 적었다.
익조 이행리의 출신과 승계
익조의 배위는 효비 이씨(李氏)로, 실록은 같은 이씨가 아니라고 특별히 밝혀 두었다. 천우위 장사 이공숙의 딸이다. 그 사이에서 행리가 태어났으니 이 분이 익조다.
목조(穆祖)의 배위(配位)는 효비(孝妃) 이씨(李氏)이니,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 천우위 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이다. 휘(諱) 이행리(李行里)를 낳았으니, 이 분이 익조(翼祖)이다. 지원(至元) 12년(1275) 을해 3월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태조실록』 총서 2장 A면 (1275), 국역 인용
1281년 일본 정벌에 나서다
1281년 세조(쿠빌라이)가 일본을 정벌할 때, 천하의 병선이 합포(合浦)에 모였다. 익조는 상사의 문자를 받아 본소의 인호(人戶)에서 군인을 뽑았다. 그는 쌍성총관부의 삼살 천호, 몽고의 대탑실 등과 함께 정벌에 나아갔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1230-1234 Mongol Invasion of Jin" (작성자 Qiushufang, CC BY-SA 4.0)
익조는 고려의 충렬왕을 뵈었다. 두세 번에 이르러 더욱 공손하고 삼가며 사과하였다. 실록은 그 말을 이렇게 적는다.
선신(先臣)께서 북방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虎狼)의 아가리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고,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한 것은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옵소서.— 『태조실록』 총서 2장 A면 (1281), 국역 인용. 선신은 목조를 가리킨다.
경(卿)은 본디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지금 경의 거지(擧止)를 보니 마음이 있는 바를 알겠다.— 충렬왕의 답, 『태조실록』 총서 2장 A면 (1281)
충렬왕은 익조의 말을 듣고 "경은 본디 사족(士族)이니"라고 답하였다. 실록은 이 대화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 화가 말하는 세 가지 사실
첫째, 목조는 1274년 12월 훙하여 경흥부 성 남쪽에 장사되었다. 둘째, 익조 이행리는 1275년 3월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셋째, 1281년 익조는 원의 일본 정벌에 군인을 보냈고, 고려 왕 앞에서 사과와 해명을 올렸다. 세 사실 모두 연도가 붙어 있다.
익조가 여진 천호들의 모해를 피해 알동의 백성을 이끌고 적도(赤島)를 건넌 기록과, 1290년 의주로 돌아온 일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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