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영성군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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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대하 (2화) 목조 이안사 — 북방에 터를 잡다

1254년은 송나라 이종 보우 2년이자 원나라 헌종 4년, 고려 고종 41년 갑인이다. 이 해에 목조 이안사가 개원로 남경의 알동(斡東)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였다. 전주에서 시작된 이안사의 행로가 북방 알동에서 한 매듭을 짓는 해다. 이 화에서는 『태조실록』 총서와 『용비어천가』의 기록으로 그 과정을 따라간다.

몽골의 고려 침입 경로 지도(1235년)
그림 1. 1235년 몽골의 고려 침입 경로 지도. 1231년부터 이어진 몽골의 고려 침입 시기의 한 장면이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1235 mongol invasion of korea" (작성자 Qiushufang, CC BY-SA 4.0)

원의 요구에 응하다

쌍성(雙城, 곧 영흥)에 주둔한 원나라의 산길 대왕은 철령 이북 지방을 차지하려 하였다. 『태조실록』은 쌍성 이북 지방이 개원로에 소속되었다고 적는다. 산길은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 『태조실록』 총서 1장 A면 (1254), 국역 인용

이보다 앞서 평양의 백성들도 목조의 위세와 명망을 듣고 따르는 이가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께 따라왔다. 산길은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몽골 제국의 영역 지도
그림 2. 몽골 제국의 영역 지도. 원의 행정 질서 속에서 이 시기 동북방이 놓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Mongol Empireaccuratefinal" (CC BY-SA 3.0)

옥배와 맹세, 그리고 혼인

연회가 끝날 무렵 산길은 친히 옥배를 목조의 품속에 넣어 주며 말하였다. 실록은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공(公)의 가인(家人)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서로 친하는 지극한 정리를 알겠습니까? 부족하나마 옥배(玉杯)로써 나의 정을 표시할 뿐입니다.
— 『태조실록』 총서 1장 A면, 국역 인용

두 사람은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라고 함께 맹세하였다. 목조는 이에 동종(同宗)의 딸을 산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시리를 지나 알동에 자리 잡다

목조는 수로와 육로를 지나 시리(곧 이성)에 이르렀다. 그곳 천호가 군사로 길을 막자, 목조는 귀순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천호는 연회를 베풀어 후하게 위로하였고, 목조도 소와 말로 답례하였다. 그 뒤 목조는 개원로 남경의 알동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실록은 알동의 위치를 남경 동남쪽 90여 리, 지금의 경흥부 동쪽 30리라고 적었다. 그 평야에는 큰 토성이 있었고, 남경의 평야에도 큰 토성이, 그 북쪽 7, 8리에는 큰 석성이 있었다. 모두 목조가 관령한 군민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실록은 기록한다.

천호소의 수천호가 되다

이듬해인 1255년, 산길이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렸다. 원나라는 알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었다. 목조는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가 되었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였다.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金牌)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 『태조실록』 총서 1장 B면 (1255), 국역 인용

실록은 이어서 알동 동남쪽 30여 리의 해도 자고라(者考羅)에 목조가 석성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고 적는다.

용비어천가가 노래한 땅

『용비어천가』 제3장은 시조가 살아간 땅을 주나라 대왕의 고사에 견주어 노래한다.

주나라 대왕이 빈곡에 살으사 제왕의 업적을 여시니 / 우리 시조께서 경흥에 살으사 임금의 업적을 여시니
— 『용비어천가』 제3장, 현대어 풀이 (위키문헌 원문 대조)

제4장은 같은 땅에서 겪은 옮김을 노래한다.

오랑캐들 사이에 가셔서 오랑캐들이 가래거늘 기산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니 / 야만인들 사이에 가셔서 야만인들이 가래거늘 덕원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니
— 『용비어천가』 제4장, 현대어 풀이

실록은 목조가 머문 의주에 "곧 덕원(德原)"이라고 주를 달았다. 제4장의 '덕원'은 이 주와 같은 지명이다. 제3장의 '경흥'은 실록이 알동의 위치를 경흥부 동쪽 30리로 적은 기록과 대조할 수 있다.

이 화가 말하는 세 가지 사실

첫째, 목조는 원의 요구에 따라 김보노 등 1천여 호와 함께 항복하였다. 둘째, 1254년 알동에 거처를 정하였다. 셋째, 1255년 원은 그를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세 사실은 모두 『태조실록』 총서에 연도와 함께 적혀 있다.

다음 화 예고
목조가 1274년 12월 훙(薨)하고, 익조 이행리가 1275년 3월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는 기록을 다룬다. 장사 장소와 덕릉의 유래도 함께 본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총서 1장 A면(1254,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 · 총서 1장 B면(1255) · 총서 2장 A면(해도 자고라) · 『용비어천가』 제3장·제4장(위키문헌 원문 대조) · 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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