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확인일 2026.10.26 · 발행일 2026-11-01

1388년,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위화도회군」은 우왕 14년 4월 18일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5월 위화도에 이른 뒤 회군했다고 정리한다. 『태조실록』 총서의 해당 기사도 위화도에 머문 군사들 사이에서 도망이 끊이지 않았고, 비로 물이 불어 압록강 일대의 이동이 어려웠다는 상언을 전한다.
회군의 배경은 하나가 아니다. 이성계가 정벌에 반대하며 든 네 가지 이유, 곧 대국을 거스르는 문제·여름철 출병·왜구 대응의 공백·장마와 병기 손상을 둘러싼 판단은 후대에 ‘사불가’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회군은 단순한 군사 판단에 그치지 않았다.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향한 뒤 최영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면서, 고려의 정치 질서 자체가 크게 흔들렸다.
날짜와 경과는 기록마다 세부가 다를 수 있다. 백과사전은 5월 22일 회군 결정, 6월 1일 개경 인근 도착, 6월 3일 개경 진입과 최영 체포, 6월 8일 우왕 폐위를 제시한다. 이 글은 그 연표를 참고하되, 이성계가 혼자 모든 일을 결정했다거나 당시의 반대와 동요가 없었다고 쓰지 않는다. 조민수와 여러 장수, 우왕과 최영, 조정의 세력이 얽힌 권력 변동이었다.
또한 『태조실록』 총서는 조선이 성립한 뒤의 기록이다. 회군을 건국의 정당한 출발로 보이게 하는 서술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다고 사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위화도 회군은 이후 왕위 교체와 제도 개혁의 조건을 바꾼 분기점이었다.
회군의 원인과 평가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 글은 실록 기사와 공식 해설이 공통으로 전하는 군사·정치 상황을 구분해 소개한다.

회군 뒤 곧바로 조선이 세워진 것은 아니다. 우왕·창왕의 폐위와 공양왕 옹립, 여러 정치 세력의 재편을 거쳐 1392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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