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확인일 2026.10.26 · 발행일 2026-10-30

공민왕 13년인 1364년, 『태조실록』 총서는 고려 출신 최유(崔濡)가 원에 있으면서 기황후와 연결되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 탑사첩목아를 세우려 했다고 적었다. 요양성 군사가 정월 압록강을 건넜고, 안우경(安遇慶) 등이 방어하다 물러났으며, 최영(崔瑩)과 이성계 등이 맞섰다는 것이 기사의 줄거리다.
이 사건은 ‘고려 대 원’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정리하기 어렵다. 원의 권위가 약해지는 시기에 고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세력과 북방 군사가 결합했고, 공민왕 정권은 그 압력에 대응해야 했다. 기사에는 기황후의 감정과 최유의 책략이 길게 서술되지만, 이는 조선 왕실이 과거의 정치적 갈등을 정리해 남긴 서술이기도 하다. 인물의 속마음이나 비밀스러운 의도를 확정하는 근거로는 조심해야 한다.
이성계의 위치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는 단독의 주인공이 아니라 최영을 비롯한 여러 고려 장수와 함께 등장한다. 후대의 왕실 기록은 건국자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당시의 방어와 전쟁은 여러 지휘관·군사·지역 사회가 함께 감당한 일이었다. 연재는 이성계를 과장하기보다, 그가 국가적 군사 대응의 한 축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본다.
1364년의 방어는 고려가 북방의 압력에서 곧바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이후에도 여진 세력, 왜구, 명과의 관계가 차례로 정치와 군사의 과제가 된다. 이성계의 이름이 더 자주 사료에 나타나는 까닭도, 개인의 성장 서사만이 아니라 고려 말의 위기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기황후와 최유의 동기는 후대 기록의 해석을 포함한다. 이 글은 압록강 도강과 고려의 방어라는 확인 가능한 사건을 중심으로 쓴다.

다음 회차는 전투 기사 하나를 건너뛰지 않고, 1380년 황산대첩으로 간다. 그 사이의 세월을 영웅담으로 메우지 않고, 확인 가능한 기록이 두터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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