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0년대, 전주 이씨 이안사(李安社)가 전주를 떠났다. 관기(官妓)의 일로 주관(州官)과 틈이 생겨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그가 길을 나설 때 백성 170여 가(家)가 스스로 따라나섰다. 훗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가 된 사람, 목조(穆祖) 이안사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총서)
전주 이씨, 그 뿌리
태조실록 총서는 태조의 선대를 시조 이한(李翰)부터 차례로 적는다. 사공(司空) 이한에서 시작해 대장군 이린(李隣)을 거쳐 장군 이양무(李陽茂)에 이르고, 이양무가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안사(安社)를 낳았으니, 이 분이 목조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목조의 본관은 전주(全州)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인 1394년(태조 3), 태조는 4대조를 임금으로 추존하며 그를 목조라 하였다. 덕을 베풀고 의로써 행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조」)
전주 경기전(慶基殿). 태조 어진을 모신 전각으로, 전주 이씨 왕조의 본향 전주를 상징한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 Bernard Gagnon (CC0)
관기 사건 — 전주를 떠나다
총서는 이안사의 성품을 "호방(豪放)하여 사방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고 적었다. 전주에 살 때 나이 20여 세였는데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객관(客館)에서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관기의 일로 주관과 틈이 생기자, 주관이 안렴사(按廉使)와 의논하여 군사를 내어 그를 치려 하였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목조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 삼척현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 이사한 자가 170여 가였다.
전주의 토호였던 한 사람을 두고 170여 가가 스스로 길을 함께한 것이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조」)
삼척에서 — 배 열다섯 척
삼척에 자리 잡은 이안사는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倭寇)를 방비하였다. 조금 뒤 원(元)나라 야굴대왕(也窟大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침략하니, 그는 두타산성(頭陀山城)을 지켜 난리를 피하였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1253년 몽골(원)의 고려 침입. 이안사가 두타산성을 지켜 난리를 피한 것도 이 무렵의 일로 기록된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 Qiushufang (CC BY-SA 4.0)
바다를 건너 동북면으로
삼척도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다. 때마침 전날 다투었던 그 산성 별감이 새로 안렴사에 임명되어 삼척으로 오게 되었다. 이안사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에 이르러 살았다. 의주는 곧 덕원(德源)이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이번에도 백성 170여 호가 따라갔다. 실록은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고 적었다. 고려 조정은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고원(高原)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함경도 함흥에 남은 이성계 집터. 이안사가 터를 잡은 동북면은 훗날 이씨 왕조가 일어난 땅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 Clay Gilliland (CC BY-SA 2.0)
용비어천가가 노래한 목조
용비어천가 제3장은 이 대목을 노래한다.
今我始祖 慶興是宅 慶興是宅 肇開鴻業
周國 大王이〮 豳谷애〮 사〯ᄅᆞ샤〮 帝業을〮 여〯르〮시니〮
우리 始祖ㅣ 慶興에〮 사〯ᄅᆞ샤〮 王業을〮 여〯르〮시니〮
주나라 대왕이 빈곡에 살으사 제왕의 업적을 여시니
우리 시조께서 경흥에 살으사 임금의 업적을 여시니
중국의 주(周)나라가 빈곡에서 나라의 기틀을 열었듯, 우리 선조가 경흥(慶興) 땅에 자리 잡고 왕업을 열었다는 노래다. 용비어천가에서 제3장부터 제8장까지는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추존왕 네 분의 행적을 노래한 부분이다. (출처: 용비어천가 제3장, 위키문헌 원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 세종 때 지어져 1447년 간행된, 한글로 적힌 최초의 문헌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퍼블릭 도메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난 일은 한 사람이 화를 피해 고향을 등진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옮겨 간 동북면은 훗날 이씨 왕조가 일어난 땅이 되었다. 용비어천가 서문도 "목조가 북방에서 터를 열었다(穆祖肇基朔方)"고 적었다. (출처: 용비어천가 서문)
다음 화 예고
동북면에 자리 잡은 이안사 앞에 원(元)의 요구가 닥친다. 다음 화에서는 이안사가 원 산길 대왕(散吉大王)의 요청을 받아들여 알동(斡東)에 터를 잡고, 원으로부터 오천호소(五千戶所) 수천호 겸 달루가치(達魯花赤)의 직을 받는 대목을 따라간다. (출처: 태조실록 총서)
출처: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총서(sillok.history.go.kr) · 용비어천가 제3장(위키문헌 원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조」·「용비어천가」 · 위키미디어 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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