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 왕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블로그 주인장입니다. 😊 조선의 왕들은 수많은 왕자와 옹주를 두었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드라마틱한 시기에 태어나 특별한 삶을 살았던 인물, 영성군 이계(寧城君 李㻑)에 대해 집중 탐구해 보려고 합니다.
영성군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13남이자 막내아들로, 선조의 만년에 태어나 많은 관심과 비호를 받았습니다. 특히 이복형인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복잡한 정국 속에서, 그는 어떤 논란에 휩싸였고 어떻게 무사히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영성군의 생애와 그의 독특한 후손 가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영성군 묘역 |
1. 영성군 이계(李㻑): 탄생과 기본 정보 👑
영성군 이계는 1606년(선조 39년) 음력 12월 24일, 아버지 선조와 후궁 온빈 한씨(溫嬪 韓氏)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선조가 55세 되던 해에 얻은 늦둥이 막내아들이었죠.
온빈 한씨는 흥안군(興安君), 경평군(慶平君), 정화옹주(貞和翁主)를 낳은 후궁으로, 영성군은 이들의 친동생입니다. 이복형제로는 광해군, 정원군(훗날 인조의 아버지) 등이 있습니다. 그의 자세한 신상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구분 | 내용 |
|---|---|
| 이름/휘 | 이계(李㻑) |
| 생부/생모 | 선조 / 온빈 한씨 |
| 출생/사망 | 1606년 음력 12월 24일(양:1607.01.21) ~ 1649년 음력 9월 19일(양:10.24) (향년 44세) |
| 시호 | 효경(孝景) |
영성군은 효종 원년(1649년)에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는 '효도하고(孝) 사물을 밝게 본다(景)'는 뜻의 효경(孝景)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묘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125-15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영성군묘 |
2. 인조의 특별한 비호: 논란 속에서 무사했던 왕자 🛡️
영성군은 '인조반정' 이후 인조(선조의 손자)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그는 선조의 막내 왕자였기 때문에, 인조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차례의 큰 논란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인조의 배려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① 종의 무단 감옥 침입 사건 (1632년)
1632년, 영성군의 종이 무단으로 감옥에 들어가 갇혀있던 죄수들을 시켜 관원들을 욕보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대간(사헌부, 사간원)에서는 왕자의 종이라 할지라도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성군 측을 강하게 탄핵했으나, 인조는 별다른 처벌 없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② 인목왕후 연제 불참 사건 (1633년)
이듬해인 1633년, 인목왕후의 연제(練祭)에 형인 경평군과 함께 병을 핑계로 불참했습니다. 연제는 중요한 국상 의식이었기에, 이 또한 대간들의 탄핵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인조는 "두 왕자가 평소에도 병이 많다"며 배려하여 탄핵을 무사히 넘기게 해주었습니다.
연제(練祭)는 상을 당한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인 소상(小祥)이 끝나는 때에 행하는 의식입니다. 이는 삼년상(三年喪)을 치르는 과정 중 매우 중요한 절차 중 하나입니다.
3. 배우자와 후손: 96세 장수한 회원군 가계 🌳
영성군은 회산군부인 창원 황씨(檜山郡夫人 昌原 黃氏)와 결혼했습니다. 창원 황씨는 황이중(黃履中)의 딸로, 이들 사이에서는 2남 2녀가 태어났습니다.
① 96세 장수한 아들, 회원군 이윤(李倫)
영성군의 적장남인 회원군 이윤(檜原君 李倫)은 1636년에 태어나 무려 1731년까지 96세의 장수를 누렸습니다. 그는 인조 시대부터 영조 시대까지 사옹원, 종친부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낸 인물로, 영조 즉위년에는 그의 장수를 기려 손자들이 특별히 가자(加資, 품계를 올려줌)되기도 했습니다.
② 광평대군 가계로 이어진 후사
회원군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요절하는 바람에, 먼 종친인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9세손[홍(泓), 부:시황(時煌)]을 양자로 들여 함평군(咸平君)에 봉하여 후사를 이었습니다. 이처럼 조선 왕실은 직계가 끊기면 다른 대군(왕자)의 후손을 입양하여 대를 잇는 전통을 지켰습니다.
현재 영성군파 후손은 약 200세대 미만으로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이재항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영성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성군 가계는 조선 왕실의 복잡한 계승과 종친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핵심 요약: 영성군 이계의 3가지 포인트 📝
영성군 이계의 생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세 가지 핵심 사실을 정리해 봅시다.
영성군 이계(李㻑) 3가지 핵심
자주 묻는 질문 ❓
지금까지 선조의 막내 왕자, 영성군 이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고, 논란 속에서도 인조의 배려로 평탄한 삶을 살았으며, 후손인 회원군이 96세까지 장수하는 등 흥미로운 역사를 남긴 인물입니다.
영성군의 삶은 혼란했던 광해군-인조 시대를 살았던 한 왕족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흥미로운 왕실 이야기로 찾아올지 기대해주세요! 😊
가족관계 📝
영성군은 [인열왕후] 한씨의 외숙부 황이중의 딸 회산군부인 황씨와 결혼하여 아들은 회원군 1명, 딸은 이덕이, 이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2명을 낳았다. 그리고 소실 승춘과의 사이에서 회천도정 이선을 얻었으나 회천도정은 일찍 죽어 대가 끊겼다. 황씨는 회산군부인(檜山郡夫人)에 봉해졌다.
회원군은 인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 살며 사옹원, 종친부, 도총부 등에서 관직을 두루 지냈다.[1] 1724년(영조 즉위년) 회원군의 나이가 90에 가까워 영조로부터 그 손자들이 가자되었고, 1731년(영조 7년) 음력 8월 6일 향년 96세로 사망하여 조정에서 관으로 쓸 재료와 3년분의 녹미를 지급하였다..
회원군 역시 아들 이규령 하나만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는 바람에 후사가 끊겨 [세종대왕]의 적5남[광평대군]의 9세손 "홍(泓)" 을 양자로 들이고 함평군(咸平君)에 봉하여 대를 이었고 함평군은 아들을 6명(해흥군 · 해춘군 · 해운군 · 해청군 · 해봉군 · 해영도정)을 낳아 현재까지 대가 이어온다. 그래서 지금 현재 영성군의 후손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광평대군의 자손이다. 왜 전부가 아닌 대부분이냐면, 이후 다른 후손들 중에서 양자를 고를 때 광평대군파가 아닌 다른 파에서 데려온 경우가 몇 군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함평군(咸平君)은 아들을 6명이나 두었으나, 현재의 영성군파는 총 200세대 미만으로 그 수가 적은 편이라고 한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재항 등이 영성군의 후손이다.
부왕 : 제14대 선조(宣祖, 1552 ~ 1608, 재위 : 1567 ~ 1608)
생모 : 온빈 한씨(溫嬪 韓氏, 1581 ~ 1664)
형 : 흥안군 이제(興安君) 이제(李瑅, 1598 ~ 1624)
형 :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 1600 ~ 1673)
누나 : 정화옹주(貞和翁主, 1604 ~ 1667)
정부인 : 회산군부인 창원 황씨(檜山郡夫人 昌原 黃氏) - 황이중(黃履中)의 딸
적장남 :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 1636 ~ 1731)
적장녀 : 이덕이(李德伊, 1629 ~ ?)[8]
사위 : 전의 이씨 이양원(李養源)
적차녀 : 남양 홍씨 홍수범(洪受範)의 처 전주 이씨(1633 ~ ?)[8]
측실(노비) : 승춘(承春)[9]
서장남 : 회천도정(檜川都正) 이선(李僎, 1645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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