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영성군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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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뿌리: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모든 것

 

 

[전주이씨의 위대한 시조, 이한(李翰)은 누구인가?] 신라 사공 벼슬을 지내고 조선 왕실의 뿌리를 세운 이한 시조의 생애와 배위 경주김씨의 고귀한 가계를 친근하게 풀어봅니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탐험해 볼까요? 💡

안녕하세요!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블로그 주인장입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수많은 성씨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전주이씨💡만큼 무게감이 느껴지는 성씨도 드물 거예요.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가문의 뿌리이니까요. 저도 늘 궁금했어요. 도대체 이 거대한 역사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오늘은 바로 그 질문의 해답, 전주이씨의 시조이신 제 1대조 이한(李翰) 시조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고문서에 적힌 한 줄의 기록이지만, 그 한 줄에서 우리는 신라 말의 격변기를 살았던 한 위대한 인물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어요. 뭐랄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분을 직접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그럼 지금부터 전주이씨의 견고한 뿌리를 함께 찾아가 봅시다!

전주이씨 이화마크


 

1. 시조 이한(李翰)은 누구인가? - 휘(諱)와 벼슬 📜

전주이씨 족보를 보면 시조이신 이한(李翰) 시조님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분의 휘(諱)는 한(翰, 붓 한이시고요, 호(號)는 견성(甄城)이시라고 해요.

여기서 잠깐, 휘(諱)는 돌아가신 분의 성함을 높여 부르는 말로, 그분의 성함 자체는 '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견성(甄城)은 아마도 이분이 활약했던 지역이나 관련된 지명에서 따온 호칭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견성'이라는 호가 가지는 의미는 후에 전주이씨의 본관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답니다.

💡 역사 용어 해설: 휘와 호
휘(諱)는 왕이나 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쓰는 용어이고, 호(號)는 본명 외에 스스로 짓거나 다른 사람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이한 시조님의 이름(휘)과 별칭(호)을 통해 그분이 가졌던 사회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조 이한께서는 신라 시대에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지내셨다고 합니다. 사공은 당시 신라의 관직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였어요. 물론 신라 하대에 이르러 그 위상이 다소 변화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높은 관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사공은 고대 중국에서 토목, 건축 등의 공사를 담당하던 관직이었는데, 신라에서는 상대등, 시중(집사부) 다음가는 정치적 실권을 가진 최고위직 중 하나였습니다. 이 기록은 전주이씨의 뿌리가 이미 신라 때부터 중앙 정계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거죠.

 

2. 가문의 뿌리: 배위 경주김씨와의 만남 💍

시조님의 가계는 배위(配位), 즉 부인과의 연결에서도 그 품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한 시조님의 부인은 경주김씨이시며, 그분의 아버지는 군윤(軍尹) 은의(殷義)입니다.

이 배위 경주김씨 부인 가문의 배경이 정말 대단해요. 무려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이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인즉슨, 조선을 세운 전주이씨의 뿌리가 신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직계 후손 가문과 혼인을 통해 결합했다는 뜻이 됩니다. 와, 정말 대단한 조합이죠!

구분 시조 이한(李翰) 배위 경주김씨
주요 직책 신라 사공(司空) 부친: 군윤(軍尹) 은의(殷義)
가계 배경 전주이씨 시조(始祖)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이러한 혼인은 단순히 두 집안의 결합을 넘어, 신라 말 호족으로 성장하던 이한 시조 가문이 당시 최고의 명문가였던 신라 왕실 계통과 연을 맺음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강력한 기반 덕분에 후손들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명문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거예요. 제 생각엔 이 결혼이야말로 전주이씨 가문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아닐까 싶네요!

 

3. 이한 시조의 역사적 의미와 후대의 발자취 👣

이한 시조님의 호가 견성(甄城)이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견성은 오늘날의 전주(全州)를 지칭하는 옛 이름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시조님의 이름과 직책이 전주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한 시조님이 바로 전주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전주이씨가 이 지역을 본관으로 삼은 이유가 명확해지는 대목이죠.

⚠️ 주의하세요! 사공 벼슬의 해석
일부 기록에서 이한 시조를 신라 말기의 인물로 보아 사공 벼슬이 중앙의 실권직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가문의 족보 기록에 충실히 따른다면 신라시대의 고위 관직자였다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때로 한 가지 해석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이한 시조님의 굳건한 기반 위에서 후손들은 전주이씨 가문을 빛내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고려시대: 후손들이 문과에 급제하고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 가문의 명성이 이어졌습니다.
  • 조선 건국: 시조 이한으로부터 21대손인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며, 전주이씨는 명실상부한 왕실의 성씨가 됩니다.
  • 왕실의 재조명: 조선 건국 후, 이한 시조는 왕실의 직계 조상으로 추존되어 더욱 존경받게 되었으며, 이는 가문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글의 핵심 요약: 이한 시조의 발자취 📝

지금까지 살펴본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에 대한 핵심 정보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서, 이 위대한 시작을 마음에 새겨 봅시다.

  1. 시조의 휘와 호: 이름은 한(翰), 호는 견성(甄城)입니다. 견성은 전주를 상징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죠.
  2. 신라 고위 관직: 신라 시대 사공(司空) 벼슬을 지내며 유력한 세력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3. 왕실의 결합: 배위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와 혼인하며 가문의 정통성을 더했습니다.
  4. 조선 왕실의 뿌리: 시조 이한의 굳건한 기반이 약 1000년 후 이성계의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역사의 시작점이 됩니다.
💡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 3가지 핵심

신라 시대 벼슬: 사공(司空)을 지낸 중앙 정계 인물
호(號)의 의미: 호가 견성(甄城)으로, 본관 전주(全州)와의 연결고리
배위 가문의 격:
경주김씨 부인 =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후대의 유산: 시조의 기반이 조선 왕실의 뿌리가 됨

자주 묻는 질문 ❓

Q: 이한(李翰) 시조는 정확히 어느 시대 사람인가요?
A: 이한 시조는 신라 시대 사공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말기에서 후삼국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Q: 시조의 호(號)인 견성(甄城)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견성(甄城)은 전주이씨의 본관인 전주의 옛 이름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이는 이한 시조님이 전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유력 호족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Q: 경주김씨 부인이 태종무열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가요?
A: 네, 매우 중요합니다. 신라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태종무열왕 가문과의 혼인은 당시 이한 시조 가문의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은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 시조님에 대해 깊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가문의 시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견고한지를 알게 되니, 역사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이한 시조님과 경주김씨 부인께서 닦아 놓으신 단단한 뿌리 덕분에 오늘날 조선 왕실이라는 거목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 정말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댓글로 물어봐주세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더 풍성해질 거예요. 😊

더 많은 시조  이한(李翰) 가문 이야기

1. 본관 유래
전주(全州)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 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景德王)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여 년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완산부로 하였다. 조선 태조(太祖) 때는 선조(先祖)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 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가 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2. 시조 가문 유래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한(李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 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 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였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穆祖)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 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 이어서 목조(穆祖)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 德源)에 정착하였다.

그후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 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였다. 그리하여 원주민 5천 호(五千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23대 왕) 조(朝)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穆祖)에게 쏠려 쫓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穆祖)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는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 고 하였다. 익조(穆祖)가 보인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疆)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功)을 세우고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功)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우왕(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소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功)을 세웠다. 환조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丸彫)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鄰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 중심의 권력구조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온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0여 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이를 시대(時代)에 따라 세 갈래로 구분하면, 첫째 이태조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 안사(安社)의 상대(上代)에서 갈려진 파로는 시조 한(翰)의 14세손

궁진(宮進)의 둘째 아들 단신(端信)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중공파(侍中公派),
15 세손 용부(勇夫)의 둘째 아들 거(琚)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세손 양무(陽茂)의 셋째 아들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가 있다.


그리고 둘째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서 갈려진 파로는 안사의 아들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대군(安興大君) 파와 익조(翼祖) 행리(行里)의 아들 함녕(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함성대군(咸城大君) 등 12파가 있으며, 탁조(度祖) 춘(椿)의 아들 완풍대군(完豊大君)과 의안대군(義安大君) 등을 포함하여 총 18개 파가 있다. 셋째 태조의 후대에서 갈려진 파로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개파(대군 : 25, 군 : 74)로 알려졌으나 미취졸(未娶卒 : 결혼전에 죽음)이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大君)이 20명 정도가 됨으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출처: 한국인의 족보  http://xn--3e0bm80a8yhwdw5c209b.com/search/view/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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